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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안드레아 "성 김대건 성당"과 대건고의 김대건 신부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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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안드레아 "성 김대건 성당"과 천주교 김대건 신부의 생애!

 

 

 

성 김대건 성당은, 대구시 수성구에 1987년도에 설립된 천주교 대구 대교구이며,1987년에 설립된성당이다. 김대건 신부는 천주교 신앙인이면 모두 다 숭앙하는 한국 최초의 신부이며,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로 알려져 있으며,세례명은 안드레아,아명은 재복 본명은 지식이며,관명은 대건,본관은 김해이다.천주교 103인 성인중 한명으로 선정되어 있다.김대건 신부(1821~1846)는 충청남도 당진시에는 김대건 신부생가지로 지정된 충청남도의 기념물 제146호로 지정된곳이다.성당의 이름에 김대건이라는 인명이 들어간것을 보고,성당의 이름에 들어갈 정도로,천주교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끼친 인물인가 하는 궁금점에,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에 대해 알아보았다. 

 

성 김대건 성당 미사시간

 

  ▶토요일:오후3시(어린이),오후 7시30분

  ▶주일:오전6시30분,9시(중,고생),오후5시(청년),7시30분

  ▶평일:월:오전6시30분

            화~토:오전 10시

            화~금:오후 7시30분

 

 

성 김대건 신부 일생은, 청남도 당진 내포(솔뫼)에서 태어났으며,양반 집안의 자식이었으나,증조부가 천주교를 믿다가,순교 하시고, 1827년 김대건 신부와 가족들이 박해를 피해 용인으로 이주하였고,한국 교회를 위한 사제가 되기 위해 마카오로 떠나기전 산골에서 숨어 살기도 했었다 .1836년 16살의 어린 나이에 모방 신부에게 영세를 받고 "안드레아"라는 세례명을 받았다.김재복은 어린시절의 이름이고 "대건"이라는 이름은 마카오에서 해외유학을 하면서 불렸던 이름이다.마카오에서 5년여동안 "신문학 공부"를 마치고 사제로 돌아오던, 만20세인 기해년(1839.09)에는 조선에서 천주교 탄압이 최고조로 달하는 해였다.그는 돌아 와서, 자신에게 세례명을 준 모방신부와, 친부인 김제준도 서울 서소문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낙담하기도 했다.조선에 돌아온 김대건 신부는 얼마 있지 않아,상하이로 떠나고,거기에서 페리올 신부를 만나, 상하이 금가항에 있는 성당에서 주교의 집전으로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페레올 주교를 모시고,귀국한 김대건 신부는 주교의 명에 의해 마을 주민들과 함께 신자들과 숨어서 신앙생활을 하던중 ,1845년 5월25일 황해도 연평도로 가라는 주교의 명을 받고,연평도에 도착하였으나,거기에서 신분이 노출되어 조선 관군에게 잡히게 되고 ,그해 9월16일 서울 한강가의 새남터 형장에서 25세의 나이로 순교하고,그의 시신은 미사리에 안장되었다.젊은 나이에 너무나 애석하지만 자신의 신념과 믿음을 탄압과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자신의 신념대로 세상을 살다간 위인으로 지금도 숭앙받고 있다.대구 명문 자사고인 대건고에" 안드레아관"과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김대건 신부의 유적지로는 "골배마을 성지"가 있다.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 골짜기에 있다.옛날부터 첩첩산중이어서 뱀과 전갈등이 많이 남오는 배마을이라고 불리던 곳으로 "배마실"이라고도 부른다.김대건 신부의 집터가 있는것으로 전해왔으며,1961년 신도들에 의해 성지로 만들어 졌다.향후 김대건 심부의 생가를 복원하고 신부의 가족상도 설치할 계획이라 한다.1966년 6월에는 은이성지터에 성 김대건 신부의 성상과 제대 건물을 신축하였고,1997년 7월에는 공배마을 성지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동상을 제막하기도 하였다.같은 해 양지성당 본당 설절 70주년및 성전 축성식을 거행하고 김대건 전시관을 개관하였다."은이 성지"는 천주교의 최대의 성지로 불리는 곳이다.

 

 

타종교의 순교자로,"이차돈" 고구려 소수림왕때의 사람으로 최초로 불교를 전파하다 죽은 한국 최초의 순교자이다.최초의 기독교 순교자로 알려진 집사 "스테반(Stephen)"같이,종교를 떠나,각자의 믿는 신앙의 대상과 믿음의 소신은 목숨을 걸고, 이를 수행하는 사람들의 의지력이 없었다면,오는날의 기독교,천주교등이 전 세계에 전파되지 아니 하였을 것이다. 순교자 이차돈이 없었더라면,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불교가 팔백만여의 신도를 거느린 종교집단으로 성장하게되고 보편화하게 만든  기초가 되지는 않았을것이라 생각한다.성 김대건 성당이라는 성당교회에 대한 기술에서 김대건 신부의 인생으로 주제가 변화되었지만,성인의 정신과 인생을 알수 있는 계기가 되어 이 또한,알찬 하루가 되었다.(견해에 따라,조금의 차이는 있을수 있으니, 양지 바랍니다)

 

 

 

 

 

 

 

 

 

 

 

 

 

 

 

 

 

 

 

 

 

 

 

 

 

 

 

 

 

 

 

 

 

 

 

 

 

 

 

 

 

 

 

 

 

 

 


[개설]
김대건 신부 관련 성지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세운 동상이다. 1827년 천주교 박해를 피해 숨어 들어온 골배마실과 사제 서품을 받고 처음으로 사목 활동을 펼쳤던 은이성지를 기념하기 위해 1947년 이후 여러 가지 작업이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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